이번에 소개할 원화가는 원래 권투 선수를 목표로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운동 이외에 다른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당시 잘나가던 에로게 제작사 밍크에 그래피커로 입사합니다. 출중한 그림 실력 덕분에 입사 초기부터 메인 원화를 담당했고 한 번의 이직 후 2004년에는 자신의 회사를 설립해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합니다. (사업쪽에도 재능이 있는 듯) 담당한 게임 수는 많지 않지만 독특한 분위기의 그림체 덕분에 적잖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이 원화가의 이름은 스기나 미키((杉菜水姫), 그리고 그가 대표로 있는 곳은 Innocent Grey, Noesis라는 브랜드로 활동 중인 유한회사 궁니르(グングニル)입니다.
스기나 미키는 원화 뿐만 아니라 게임 프로듀싱도 합니다. Noesis에서 발매하는 저가형 다운로드 게임들은 모두 스기나 미키가 직접 만드는데 재미있는 건 자신이 프로듀싱한 게임에는 꼭 다른 원화가를 기용하더군요. 아래 Noesis의 세 작품은 모두 스기나 미키가 프로듀싱했지만 원화가는 다 다릅니다.
스기나 미키가 그린 캐릭터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상당한 미형입니다. 심지어 악역마저 멋있어 보여 오히려 게임 분위기를 해칠 때도 있지요. 순정풍의 미형 캐릭터를 뽑아내는 데는 톱 클래스지만 단점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우선 인체 비례가 맞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Innocent Grey 때부터는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초기작인 蒐集者, 英才狂育의 이벤트 그래픽을 보면 같은 사람이 그린게 맞나 싶을 정도로 어색한 원화들이 종종 눈의 띕니다. 여기에 일러스트 자체로는 흠잡을 때 없지만 게임내에서 보면 너무 정적이라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들이 많습니다. 속도감을 느껴야 하는 장면인데도 그냥 벽에 걸어놓은 느낌이 드는, 뭐라 콕 찝을 수는 없지만 너무 조용해 보이는 그림들 덕분에 이 사람이 원화를 담당한 게임은 대부분 푹 가라앉은 느낌이 듭니다. (공교롭게도 담당한 게임들 대부분이 이런 분위기에 맞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걸 노린 것 같기도 하고...)
이제 담당한 작품들을 살펴봅시다. 모두 에로게라 가렸으니 취향이 아니신 분들은 클릭하지 마세요. 2006년 8월에 발매된 杉菜水姫 Art Tableau Collection은 英才狂育과 カルタグラ의 합본이라 제외했습니다.

蒐集者~コレクター~(しゅうしゅうしゃ) - Mink, 2001년 7월 19일 발매
원화가의 데뷰작으로 미소녀 조교 시뮬레이션 게임입니다. INO가 원화를 담당한 ぺろぺろCandy, しゃぶり姫의 연장선상에 있는 게임이지만 주인공이 좀 더 구체적입니다. 낮에는 일류 증권 회사의 유능한 사원이지만 아름다운 것, 특히 미소녀만 보면 숨겨진 본능이 꿈틀거리는 변태로 자신의 욕망을 채워줄 미소녀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거든요. (피규어 모으듯이 정말 수집합니다.)
데뷰작 치고는 원숙한 그림체가 돋보이지만 전술한 것처럼 인체 비례가 안맞는 그림들이 종종 있어 발매 당시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특이한 시스템의 게임으로 기억하시는 분들도 종종 있더군요. 당시로는 드물게 이벤트 그래픽을 확대할 수 있었고, 확대할 때 여성 캐릭터 음성이 따라서 커지는 난감한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었거든요. (처음엔 버그인 줄 알았습니다.)

英才狂育 - 九頭龍, 2003년 12월 5일 발매
제자를 성폭행한 경험이 있는 인간 말종 교사가 숙부의 학원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나날히 재정이 어려워지는 학원을 살리기 위해(정확히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핑계) 주인공은 학원장인 숙부에게 다른 방식의 영재 교육을 제안하게 되고 주인공의 전력을 알고 있는 숙부는 흔쾌히 승락합니다. (뭐냐?) 다음부터는 어떻게 진행될지 아시겠죠? 맘에 드는 학원생 약점 잡아 이렇게 괴롭히고, 저렇게 괴롭히는 조교물입니다. 스토리는 막장이지만 구성이 제법 탄탄해 후에 합본으로 재판이 나올 정도로 인기있었던 타이틀입니다.
데뷰작인 蒐集者 보다는 나아졌지만 인체 비례의 어긋남은 여기서도 종종 나타나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이런 단점을 충분히 가릴 정도로 캐릭터 디자인과 색감이 예뻐 스기나 미키는 이 작품부터 주목받는 원화가로 자리매김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작사는 망했지만 2006년 8월에 발매된 杉菜水姫 Art Tableau Collection에 포함되어 있으니 조교물 좋아하시면 플레이해 보세요.

カルタグラ ~ツキ狂イノ病~ - Innocent Grey, 2005년 4월 28일 발매
스기나 미키가 대표로 있는 Innocent Grey의 데뷰작입니다. 2년만에 발매된 신작이라 그런지 단순한 스탠딩 이미지도 일러스트급이었고 특히 캐릭터들이 전작들의 미숙함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다듬어져 있었습니다. 고어틱한(그리 심하진 않습니다.) 게임 분위기에 잘 맞는 어두운 색감도 일품이었으며 Little Wing의 배경 음악도 이런 분위기를 한껏 살려줘 오랬만에 스타일리쉬한 느낌을 받은 작품이었습니다. (탐정이랍시고 함량 미달인 추리만 남발하는 주인공 빼고) 진엔딩의 반전도 상당히 좋아 에로신 모두 빼고 관련 연출 보강해 2005년 12월 15일에는 PS2로 이식되었습니다. 포팅한 회사는 이식 전문 제작사 KID.

PP-ピアニッシモ- 操リ人形ノ輪舞 - Innocent Grey, 2006년 9월 29일 발매
제작사는 게임 장르를 스타일리쉬 미스테리 AVG로 소개하고 있는데 스타일리쉬한 분위기는 맞습니다만 미스테리물로서는 엉성한 편입니다. (오히려 전작인 カルタグラ의 전개 방식보다 더 떨어지는 느낌) 변두리 재즈바 피아니스트인 주인공이 살인 누명을 쓰고 쫒기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전체적인 느낌은 누명을 벗기 위해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는 고전적인 추리물 패턴과 히로인들과의 연애담이 적절히 섞여 있는 일방 진행형 어드벤쳐 게임이었습니다. 전작과는 달리 각 히로인 루트에 따라 달라지는 내용이 별로 없는데다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 역시 자연스럽지 않아 시나리오에선 좋은 점수를 주기가 힘드네요. 주인공이 누명을 벗어가는 과정 자체가 시나리오에 자연스럽게 녹아있어야 하는데 닥치고 해결되는 과정만 봐라 하는 식이니 어떨땐 수긍하기가 힘들었어요.
하지만 캐릭터 디자인과 원화는 극상. 장면이 바뀔 때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수준이었고 전작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Little Wing의 배경 음악 역시 게임 분위기를 띄우는데 일조했습니다. (솔직히 Innocent Grey는 게임성보다는 게임 분위기로 먹고 사는 느낌) 1930년대 변두리 카페 분위기를 물씬 느끼게 해주는 시모츠키 하루카(霜月はるか)의 오프닝과 엔딩곡도 좋았습니다.

和み匣 Innocent Greyファンディスク - Innocent Grey, 2007년 4월 6일 발매
게임 2개 발매해놓고 벌써 팬 디스크를 내길래 소재가 떨어진 줄 알았더니 내용물이 의외로 충실한 타이틀이었습니다. カルタグラ 외전격인 미니 어드벤쳐 게임이 2개나 포함되어 있었고 마작류의 미니 게임들도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벽지 및 기타 잡다한 악세사리들이 없어 아쉽긴 했지만 즐길거리가 충분한 팬디스크였습니다.

殻ノ少女 - Innocent Grey, 2008년 7월 4일 발매
유능한 형사였지만 어떤 사건으로 연인을 잃자 사표를 내고 사립 탐정일을 하는 주인공. 어느 날 예전 동료인 형사에게는 토막 살인 사건에 대한 조사를,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 교장에게는 사라진 학생의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습니다. 사건 조사 도중 만난 신비한 느낌의 소녀 토우코. 그녀는 레이지에게 세 번째 의뢰를 합니다. 진정한 자신을 찾아달라고...
물 오른 원화가의 빛나는 캐릭터, 평균 이상의 스토리 라인과 강약을 적절히 조정해 주는 배경 음악... 딱히 별로라는 느낌은 없었는데 추리물이면서도 사건 해결에 유저가 개입할 부분이 많지 않다는 것과 히로인들이 너무 잔혹하게 썰리고 표현이 적나라하다는게 걸리네요. 고어틱한 표현으로는 카르타그라와 피아니시모 이상이었습니다. 이쪽에 내성이 없으신 분들은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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