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물에서 두각을 나타낸 후 빛의 세계로 넘어간 작가들의 패턴은 크게 2가지입니다. 작품 수를 줄이더라도 에로쪽에서 발을 빼지 않는 부류가 있고 어느 시점에서 성인물과 완전히 결별하는 케이스가 있습니다. 1973년생 일러스트레이터 하이무라 키요타카(灰村キヨタカ; はいむらきよたか)는 후자인 경우인데 에로게 원화로 데뷰했지만 2004년 라노베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이쪽 일을 차츰 줄여 지금은 동인물도 전연령판을 낼 정도로 '에로한 컨텐츠'와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을 긋게 된 계기가 된 작품은 메가 히트작 어떤 마술의 금서 목록(とある魔術の禁書目録)이며 하이무라 키요타카는 이 라노베의 삽화를 그리면서 지금까지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rainbow spectrum이라는 개인 서클을 운영하면서 간간히 오리지널 동인 CG집을 내고 있습니다.
데뷰 초기에는 오야리 아시토 같은 극로리풍 그림체였는데 라노베 삽화를 맡으면서부터 모에 요소를 받아들이고 다양한 얼굴 표정이나 성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부분을 은근히 강조해 지금은 라노베 삽화가 중 톱클래스의 지명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에로게 원화가 시절 장점이었던 몽환적인 채색 스타일은 전연령 작업을 하는 지금에도 위력을 발휘해 하이무라 키요타카가 그린 소설 표지는 항상 눈에 잘 띄지요. 담당한 작품 수는 많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 중 하나입니다.
이제 하이무라 키요타카가 원화를 담당한 게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두 에로게라 가렸으니 취향이 아니면 클릭하지 마세요.
Hotel ergriffen-ホテル エァグリッフェン- - maple, 2001년 10월 26일 발매
도시의 긴 그림자를 따라 인적이 뜸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모퉁이에 Hotel ergriffen이 있습니다. 여자를 살 수 있는 이곳에서 고혹적인 눈빛으로 상대를 유혹하는 파멜라와 도발적인 매력을 가진 소악마 힐데, 청초한 느낌의 소녀 피오나가 주인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끈적끈적하고 나른한 느낌이 드는 장소에서 주인공과 세 소녀가 벌이는 은밀한 밀회, 영원과 순간이 교차되는 5일간의 이야기가 이제 막 시작되려고 합니다.
하이무라 키요타카의 에로게 원화 데뷰작으로 알맹이 없이 어려운 비유만 늘어놓는 텍스트는 물건을 쪼그라들게 만들기 충분했지만 유화풍의 독특한 원화는 괜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룻밤을 같이 지낼 소녀를 골라 몇 가지 대화문 선택으로 엔딩에 이르는 단순한 시스템의 어드벤쳐 게임인데 백일몽 같은 엔딩 일부가 기억에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로리풍의 캐릭터 디자인 때문에 오야리 아시토가 이름을 숨기고 참여한 게임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요. :)
高級娼婦 ~コルティジャーナ~ - maple, 2002년 10월 18일 발매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궁중 악사 올란이 반대파의 모함으로 왕궁에서 추방됩니다. 낙심한 나머지 술에 찌들어 살고 있었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고급 창부 아나리자가 두 명의 어린 소녀를 데려옵니다. 에미리아와 엘자라는 이름의 두 소녀는 천상의 목소리와 춤 사위를 보여주었고 이에 감동한 올란은 이들을 교육시켜 2달 후에 있을 왕국 음악 경연 대회에 나갈 결심을 합니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소녀의 재능뿐만 아니라 몸까지 탐하게 된 올란,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이런 은밀한 생활과 궁중 악사로의 복귀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데...
전작의 장점이자 단점이었던 나른한 분위기를 상당 부분 들어낸 소녀 조교물입니다. 허접한 조교 시스템이 붙어있는데 이건 오히려 플레이어를 귀찮게 하는 요소라 없느니만 못한게 문제. Hotel ergriffen의 원화는 강렬한만큼 지저분한 느낌이었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경계선이 깔끔하게 다듬어져 보는 즐거움을 더했습니다. 하지만 판매량이 별로였는지 이 작품을 끝으로 maple은 활동을 정지했습니다.
水都幻想-Venice fantastica- - wing, 2003년 9월 12일 발매
주인공 알비는 귀족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학업을 마치자 아버지는 얼굴도 모르는 여자와 정략 결혼을 시키려고 했고 이를 거부하던 알비는 말다툼 끝에 무작정 집을 나갔버립니다. 며칠 동안 거리를 헤매다 힘에 부쳐 아버지와 내연의 관계에 있는 남작 부인 아나리자에게 도움을 청했는데, 그녀는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3명의 소녀를 맡아달라고 합니다. 단순한 가정 교사 자리라고 생각해 수락했지만 아나리자가 말했던 '교육'이란 교양있는 창부가 되기 위한 성교육이었습니다.
아나리자라는 이름이 나올 때부터 눈치 채셨겠지만 2002년 10월에 발매된 高級娼婦 ~コルティジャーナ~와 스토리가 연결되는 속편입니다. maple이 전작을 끝으로 문을 닫았기 때문에 신생 제작사가 바톤을 이은 셈인데 그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버그로 인해 자주 다운되는 불완전한 시스템, 텍스트와 이벤트 그래픽이 일치되지 않는 부분이 종종 있었으며 일부 장면에서만 음성이 지원되어 캐릭터에 대한 감정 이입도 별로였습니다. 한층 미려해진 하이무라 키요타카의 원화만이 제 자리를 지켰던 평작.
ユメミルクスリ - ruf, 2005년 12월 22일 발매
양친이 사고로 죽고 아버지의 절친한 회사 동료 집에 입양된 주인공 카가미 코우헤이. 이런 환경 탓에 성격은 어둡게 변했고 주변 사람들과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주인공의 주변을 맴도는 왕따 소녀 시라키 아에카, 모범적인 학생 회장이지만 과격한 일면도 있는 키리미야 미즈키, 나사가 빠져보일 정도로 제멋대로인 캣시 네코코. 이런 소녀들을 접하면서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은 조금씩 변해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마술의 금서 목록으로 성공한 후 하이무라 키요타카가 마지막으로 담당한 에로게입니다. 시나리오가 ユメミルクスリ製作委員会로 되어있지만 게임 기획을 가족계획, 크로스채널 등으로 유명한 타나카 로미오(田中ロミオ)가 담당했고 알토네리코2, 모에모에2차대전으로 잘 알려진 리리안 죠(りりあん嬢)가 스토리 감수자로 참여했습니다. 화려한 제작진에 비해 그리 많이 알려진 게임은 아니지만 다낚아(오타 아님)의 니힐한 분위기를 좋아하신다면 체크해 보세요. 일단 금서목록풍의 원화만 봐도 본전은 건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 홈페이지: http://r-s.sakura.ne.jp/
comments
comments rss (+댓글 쓰러가기)라노벨의 삽화는 전혀 에로게 쪽 느낌이 안났었는데...의외네요.
개인적으론 역시 베니스...시절의 그림이 가장 좋았던 것 같습니다. 모에풍 그림이야 넘치고 흐르는 세상인데 자기 그림체가 있는 사람들은 그냥 좀 유지해줬으면 하는 바램이...(NOCCHI 그림 변한것도 슬픈데...흑)
개인적으로는 초기 그림이 더 마음에 드는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
PS. 그나저나 아에카랑 인덱스는 붕어빵이네요. "꿈꾸는 약"의 아에카는 정말 "불행"했는데, 다음 생애(?)이라고 할수 있는 "금서목록"에서는 행복해진 것 같아서, 유저입장에서는 상당히 기쁩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