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 소설을 무척 좋아하던 소년이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 히메야 소프트에 프로그래머로 입사했고 계열 브랜드 시즈웨어의 첫 18금 게임 금단의 혈족 개발에 참여했습니다. 아직은 프로그래밍 실력이 미숙해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이를 경험삼아 차기작인 열락의 학원에서는 시나리오까지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개발 기간 2개월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발매된 게임은 시장에서 참패했고 '디지털 코믹' 수준이라는 최악의 평가까지 받았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글쓰기를 그만둘 법도 한데 그는 좌절하지 않고 유저 엽서에 적힌 비판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자신의 약점을 보완했고 제한된 개발 기간 동안 많은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게임 스케일을 줄이더라도 감동과 재미를 줄 수 있는 게임 설정과 스토리로 승부를 볼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 작품인 데자이아에서 자신의 시나리오 라이팅 능력을 확실히 보여 주었습니다.
이 사람이 18금 게임계에서 최고의 시나리오 라이터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칸노 히로유키(菅野ひろゆき)입니다. 대표작은 데자이아, 이브 버스트 에러,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한 소녀 유노.

1994년 7월 22일에 PC-9801용으로 발매된 멀티사이드 어드벤쳐 게임의 원조격인 작품으로 1997년 9월 11일에 새턴으로 이식되었으며 1998년 6월 5일에는 Windows용으로 완전판이 발매되었습니다. 이걸로 끝이려니 생각했는데 2004년 9월 30일 완전판을 베이스로 한 PS2 버전이 나왔더군요. 이 중 주인장이 제대로 엔딩을 본 것은 새턴판과 Windows용 완전판이고 여기서는 완전판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겠습니다. (칸노 히로유키가 관여한 것은 PC-9801판이 유일하고 나머지 이식판에는 스텝롤에 이름도 들어가있지 않다고 하네요.) 완전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원작의 18금 요소를 모두 살렸고 새턴판의 리뉴얼된 그래픽과 동영상을 채용했으며 원작이나 새턴판과는 달리 티나와의 해피엔딩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달라진 엔딩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원작자가 의도한 엔딩의 여운이 사라져 나름 아쉽더군요.
스토리를 잠깐 정리해 볼까요? 게임은 신문 기자 알버트가 그란체스터 재단의 연구 시설이 있는 외딴 섬 데자이아를 취재차 방문하면서 시작됩니다. 알버트의 연인 마코토는 데자이아의 연구원이었고 둘은 그 곳에서 만날 예정이었죠. 섬에 도착한 알버트는 해변가에서 티나라는 소녀를 발견하게 되는데 티나는 생면부지의 알버트를 한 눈에 알아봅니다. 이상히 여긴 알버트가 티나를 숙소로 데려오면서부터 두 사람 사이가 꼬이기 시작하고 주변에는 이상한 사건들이 자꾸 발생합니다. 그리고는 양파 껍질 벗겨지듯 연구 시설과 티나의 비밀이 하나하나 밝혀지면서 드라마틱하게 결말을 향해 나아가지요. 칸노 히로유키의 출세작답게 타임패러독스를 소재로 한 스토리는 상당히 좋지만 전체적인 게임 구성은 이브 버스트 에러나 유노보다는 떨어집니다.
게임은 하나의 사건을 알버트의 시점으로 진행하고 다시 마코토의 시점으로 진행합니다. 같은 사건을 알버트 시점에서 한 번, 마코토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진행하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며 왜 이야기가 이렇게 진행되는지를 각각의 시나리오가 보완해 주긴 하는데 알버트 시나리오 비중이 너무 커 마코토 시나리오가 상대적으로 엉성한 느낌을 줍니다. (엄한 에로신이 자주 나오고 NTR 분위기로 일관해 더 그런지 모르겠네요.) PC-9801용은 알버트와 마코토의 시나리오를 마음대로 바꾸어가며 플레이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새턴판과 완전판은 하나의 시나리오를 완전히 클리어해야 다음 시나리오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두 시나리오를 모두 클리어하면 사건의 열쇠를 쥔 또 하나의 인물 마르티나 시점에서 엔딩까지 죽 진행됩니다. 새턴판까지는 알버트와 티나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 애매한 엔딩이지만 완전판에서는 알버트와 티나가 맺어지는 것을 암시하는 엔딩 동영상이 추가되어 어긋난 시간의 흐름에 종지부를 찍더군요. (왜 이렇게 적었는지는 플레이해 보시면 압니다.) 추가된 엔딩은 취향에 따라 선호도가 갈리겠지만 원작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처리된 것 같아 개인적으론 조금 아쉬웠습니다.
원작 그래픽을 담당한 야사마타 시야미(やさまたしやみ)의 그림체를 좋아하지 않는지라 리뉴얼된 게임 그래픽이 반갑더군요. 제작사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동영상 포맷, 루시드 모션을 사용한 오프닝과 중간 동영상들도 좋았습니다. (엄청난 압축률에 비해 깔끔한 화질을 자랑하는 포맷이었는데 프레임이나 해상도, 표현 색상 등 제약이 많아 널리 쓰이지는 못했다고 하네요.) 음악은 게임 분위기에 맞지만 기억나는 곡이 별로 없는 평이한 수준. 풀 음성 지원이며 성우들 연기는 양호합니다. 음성은 약간 탁한 느낌이 들게 샘플링되어 있는데 PS2판에서는 개선되었는지 모르겠네요. 게임 오버가 없는 일방 진행형 어드벤쳐라 그런지 시스템은 무지 간단합니다. 옵션 메뉴도 달랑 3개가 전부더군요. 클리어 후 이벤트 리플레이 모드가 없다는 게 아쉽더군요. 다시 보고 싶은 이벤트가 많은 게임인데가 메시지 스킵이 되지 않아 리플레이 모드가 절실했는데 이걸 왜 안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론은 추천입니다. 스토리 좋아하시는 어드벤처 게이머라면 꼭 플레이해 보세요. "이 유구의 나선에서 나를 구해줄 사람은 누구..."라는 티나의 조용한 멘트가 잘 어울리는 멋진 어드벤쳐 게임입니다.

comments
comments rss (+댓글 쓰러가기)엔틀레스 에이트....가 생각나
멀미가 다 나네요....우욱.....
이젠 시간 가지고 노는 미스터리물은 질렸습니다 ㅠㅠ
닥터후 라든가.. 백 투터 퓨처,프라이미벌,나비효과,시간을 달리는 소녀등등..
그래서인지 이게임도 흥미가 갑니다.
시나리오 라이터분은 추리물이 좋은면 추리계열쪽에서 활약하면 좋을것 같은데.. 19금쪽에서 더욱 활약하시다니 약간의 의외군요..^^;
뭐, 따지자면 미드중에 닥터하우스가 셜록홈즈 패러디라는것을 알고 흠칫했었지요;
이브 버스트 애러에서의 완성된 시스템과 시나리오, 유노의 지독하다고 할 만큼 엄청난 불륨감도 좋지만
좀 많이 부족한 마코토의 편과 시스템 요소가 있지만 데자이어는 왠지 정이 가는 작품입니다.
10년만에 일본에서 완전판을 구하고, 플레이하면서... 충격이었지요, '18금 게임이란 이런 거였구나' 였달까. (덕분에 마코토의 심리는 제대로 이해 가능했지만)
므흣씬이 없었더라면, 좀 더 대중적 크게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